프란치스코 교황이 2025년 4월 21일(현지시간) 오전 7시 35분, 향년 88세의 나이로 선종했습니다. 바티칸은 “오늘 오전 7시 35분, 로마의 주교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배경과 최근 건강 상태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심각한 폐렴으로 입원했다가 회복해 교황청으로 돌아온 뒤 활동을 재개하고 있었습니다8. 지난 2월에는 양쪽 폐에 폐렴이 확인되어 14일 동안 입원했었는데, 이는 그의 12년 재위 중 최장 입원 기간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호흡 곤란 증세를 겪었고, 신부전증세로 합병증 우려를 낳기도 했습니다. 교황청은 당시 그의 상태에 대해 ‘위중하다’고 표현해왔으나, 이후 점차 개선 징후를 보이면서 활동을 재개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고령인 교황의 건강 상태는 끝내 악화되어 오늘 아침 선종하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한 여정
이주민의 아들에서 로마 교황으로
본명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탈리아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화학을 공부했으나 성소를 느끼고 1969년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문제아’로 여겼다고 고백했으며, 평범한 청년이었던 그가 사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부끄러움을 아는 수치심” 때문이라고 자서전 ‘희망’에서 밝혔습니다.
1969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빈민 사목을 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축구를 즐기는 등 친근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2001년 추기경에 서임된 뒤 2005~2011년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의장을 지냈으며, 가톨릭에서 비주류인 해방신학을 수학했습니다. 대주교 시절에도 주교관 대신 아파트에서 지내고 대중교통으로 출근하며 음식을 직접 만들어 빈민가를 찾아가는 소탈한 모습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새 시대를 연 교황의 탄생
2013년 3월 13일,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한 후 진행된 콘클라베에서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4번의 투표 끝에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당시 77세의 고령으로 은퇴를 고민하던 그가 예상치 못하게 교황이 된 것입니다.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청빈과 순명의 상징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교황 명칭으로 처음 사용했습니다. 이는 그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를 지향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선택이었습니다.
최초의 기록들: 변화를 가져온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은 여러 측면에서 ‘최초’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 최초의 예수회 출신 교황
-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및 남반구 출신 교황
- 시리아 출신이었던 교황 그레고리오 3세 이후 1,282년 만에 즉위한 비(非)유럽권 출신 교황
- 교황 비오 10세 이후 바티칸 사도궁(교황 공식 거주지) 밖에서 사는 첫 번째 교황
-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한 최초의 교황
이러한 ‘최초’들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그가 가톨릭 교회에 가져온 변화의 상징이었습니다. 스스로 낮은 곳에 자리하고자 한 교황의 행보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취임 첫해인 2013년에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교황의 마음
“사회 체제의 중심에는 돈이 아니라 사람이 있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위 기간 동안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는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사회 체제의 중심에는 돈이 아닌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황은 자신의 교서 『복음의 기쁨』에서 “모든 그리스도인과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이 사회에 온전히 통합될 수 있도록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진보를 위한 하느님의 도구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귀담아 잘 들어주고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가난한 이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들은 신앙감각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통 속에서, 고통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뵙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 되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민자와 난민을 위한 헌신
프란치스코 교황의 최초 공식 행보는 이탈리아 람페두사 섬에 있는 이민자, 난민들과 만나는 일이었으며, 2016년에는 그리스 레스보스 섬을 방문해 그곳의 이민자, 난민들과 직접 만났습니다. 그는 전인적 인간 발전 촉진을 위한 부서에 두 명의 정무차관을 임명하고 이민, 난민 문제를 교황에게 직접 보고하는 체계를 구축하기도 했습니다.
“세계화 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세계화된 무관심에 빠지고 말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익숙해지면서 ‘내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아’,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라고 말하며 이민자와 난민 문제에 대한 인류의 무관심을 지적했습니다.
친근하고 새로웠던 교황의 개혁 행보
검소한 삶의 모습
프란치스코 교황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항상 검소함과 겸손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교황 선출 직후부터 그는 전통적인 교황용 화려한 의복 대신 소박한 제의를 입었고, 전통적으로 순금으로 주조해왔던 어부의 반지를 도금한 은반지로 대체했으며, 철제 십자가를 계속 착용했습니다.
또한 그는 전통적으로 교황이 거주하던 사도 궁전 대신 성녀 마르타 호텔을 자신의 거주지로 선택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평소 강조하던 검소함과 겸손함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회 문제에 대한 적극적 목소리
교황은 정치와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습니다. 2014년 한국 방문 시에는 북핵 문제를 대화로 풀어달라고 요청하며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세월호 참사 소식에도 희생자와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먼저 제안하는 등 인류의 고통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규제 없는 자본주의에 대한 경계는 그의 주요 메시지 중 하나였습니다. 2013년 9월에는 “사회 체제의 중심에는 돈이 아니라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유산과 영향
프란치스코 교황은 12년 재위 기간 동안 가톨릭 교회와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교황으로서 전 세계 60개국을 방문하며 ‘평화의 사도’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 환경 문제와 사회 정의에 대한 강한 메시지는 가톨릭 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업적은 종교적 리더로서의 역할과 사회 변혁을 위한 노력에서 두드러졌습니다. 교회의 재정 개혁을 통해 투명성을 높이고, 사회 정의를 증진하며, 환경 보호 활동에 앞장섰습니다. 특히 그의 리더십은 로마 가톨릭 교회를 현대 세상에 맞춰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결론: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가 된 교황의 여정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노력한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진정한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교회이어야 한다”라는 신념 아래, 겸손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의 생애와 가르침은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 사회 정의에 대한 열정, 그리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끊임없는 헌신을 보여주었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선종은 가톨릭 교회에 큰 상실이지만, 그가 남긴 가르침과 메시지는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즐겨 사용했던 말, “우리가 걸음을 옮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멈추어 서게 된다”는 그의 선종 후에도 우리에게 계속해서 전진하고 변화를 추구하라는 메시지로 남아있을 것입니다.